불교를 상징하는 절이나 구조물, 문양, 의식 속에는 항상 숫자가 함께 하고 있다. 그 숫자는 때로
부처님이 우리 중생들에게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려는 교시의 숫자일 때도 있고, 부처님의 말씀
을 듣고 믿음으로 실천해야 할 신행의 숫자일 때도 있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한 경전들을
펼쳐보면 수많은 숫자들이 어떤 용어 앞에 붙어 다니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이
러한 숫자들을 가리켜 법수(法數)라고 한다.
당나라 때의 고승 백장회해(百丈懷海)선사가 어느 날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눈을 떴다. 깊이 잠들어 있는 시자를 깨울 수 없어 한참을 망설이다 다시 자리에 누웠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선사가 일어나 문을 여니 뜻밖에도 잠들어 있을 줄 알았던 시자가 끓인 물을 갖다 바치는 것이 아닌가. 괴이하게 여긴 선사가 “네가 어찌 알고 나에게 물을 끓여 왔느냐”고 묻자 시자는 “누군지는 몰라도 잠자고 있는 저를 흔들어 깨우더니 물을 끓여 큰스님께 갖다 바치라고 해서 이렇게 가지고 왔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백장 선사는 손가락을 튕기며 ‘아차 내가 그 동안 헛수행을 했구나. 한순간일지라도 내 마음(一念)단속을 못하여 토지신에까지 들켜 이 지경에 이르다니….’하고 탄식을 하였다고 한다.
이 일화는 중국 선사들의 전기와 법어를 기록한 조당집에 나오는 얘기이다. 우리들로서는 백장선사가 토지신의 보호를 받을 만큼 수행이 높은 분으로 여겨지겠지만 정작 백장 선사 자신은 오히려 그것을 큰 수치로 여긴 것이다.
수행자의 마음이란 생각생각이 대상을 향해서 날아가지 않도록 항상 살피고 안으로 집중시켜야 하는데, 백장선사는 이 점을 누구보다도 중요시하면서 실천했던 것이다.
일념이라는 글자는 경전에서 두 가지 측면으로 쓰인다.
하나는 중생들이 일고 꺼지는 한 생각 한 생각 그 자체를 들어서 말할 때이고, 또 하나는 그와는 반대로 일어나고 꺼짐이 없이 일관되게 하나로 집중되어 흩어지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킬 때다.
앞의 일념이 불법을 수행하지 않는 중생들의 마음 작용을 가리킨다면, 뒤의 일념은 붑법을 닦는 수행자가 참선을 한다든가 염불을 한다든가 하여 마음이 안으로 집중되어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불교의 모든 수행이란 결국 일념을 바로 지키고 비추어 자신의 내면 속에 깃들어 있는 참부처를 친견하는 일이다.
● <『법수로 배우는 불교』. 이제열 지음. 여시아문>을 참고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