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나한과 인연 맺으려면 배고픈 다리를 건너야한다
지난달, 증심사 오백대재가 열렸다. 오백대재는 일 년에 한 번씩 오백전에 모셔진 오백나한과 인연을 맺는 날이다. 흔히 광주의 얼굴이 증심사이고, 증심사의 상징은 오백전이라 한다. 오랜 세월 광주 사람들은 증심사 오백전을 찾아 오백나한에게 기원하고 그 뜻을 성취해 왔다. 그렇게 귀한 오백전 나한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꼭 건너야 하는 다리가 있다.
바로 무등산 증심사 올라가는 길에 자리한 ‘배고픈 다리’이다. 특이한 명칭이지만 배고픈 다리의 정식 이름은 홍림교이다. 홍림교는 5.18 광주민중항쟁 당시 시민군이 항거하던 역사적 현장으로 5.18 민주화 사적지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홍림교는 정식 명칭보다 배고픈 다리로 잘 알려져 있다. 옛적에 무등산에서 나무를 하고 내려오던 나무꾼들이 산 아래에서 냇가를 만나 잠시 지게를 내려놓고 쉬었다. 이때쯤이면 허기는 지는데 먹을 것이 없어 흐르는 물로 배를 채웠다. 배고픈 다리에 얽힌 이야기이다. 그리고 배고픈 다리에는 어느 신심 깊은 불자에 얽힌 아름다운 이야기가 내려온다.
지금부터 40년 전까지만 해도 옛 광주 시청 자리에 경양방죽이라는 커다란 저수지가 있었다. 경양방죽이 한창일 때는 수심 10m, 면적 65,000평에 이르는 호남 최대 규모였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광주 시민들은 경양방죽에서 산책하며 뱃놀이를 즐겼던 유원지이다. 조선 초, 세종 때였다. 몇 년간 광주 땅에 가뭄과 흉년이 이어졌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여름 장마철에 물을 잡아 두어야 했다. 방법은 거대한 저수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세종의 농공정책 일환으로 광주 목사 김방이 3년간의 대공사를 펼쳤다. 마침내 1440년 경양방죽이 완공됐다. 당시 전라도 인구가 40만 명이었고, 경양방죽 공사에 연인원 50여 만 명이 동원됐다고 하니 얼마나 큰 공사였는지 짐작케 한다.
중장비가 없던 시절이었기에 사람들이 일일이 땅을 파야 하는 대규모 방죽공사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해를 넘길 때마다 김방은 일꾼들의 식량 부족으로 노심초사했다. 경양방죽 공사가 한창인 어느 날, 땅을 파던 공사현장에서 커다란 개미집이 나왔다. 불심 깊은 김방은 개미집을 그대로 떠서 무등산 장원봉 기슭으로 옮겨 새 집을 짓고 살도록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김방이 식량부족을 염려하며 양곡 창고를 살피던 중 희유한 광경을 목격했다. 끝없이 이어진 개미 떼가 하얀 쌀을 물어 창고까지 나르는 것이었다. 기이한 일은 매일 밤마다 이어졌다. 김방은 개미떼가 물어다 준 양식으로 경양방죽 공사를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김방에게 개미는 경양방죽 공사에서 일등공신이었다.
그 후 김방은 개미들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원을 세웠다. 무등산 증심사에 나한전을 건립하고 오백나한 봉안을 발원했다. 증심사에서 오백전 건립 불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불사가 잘 진행되던 어느 날 김방이 병을 얻어 눕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