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걸음 넘어 해탈열반
표지그림. 무아 | 박석동(법림). 수행과 봉사의 시간으로 오랜 삶을 살았다. 그때그때의 단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며 살고 있다. 지금은 남해에서 불서를 읽고 편집하며 지내고 있다.
표지그림. 무아 | 박석동(법림). 수행과 봉사의 시간으로 오랜 삶을 살았다. 그때그때의 단상을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며 살고 있다. 지금은 남해에서 불서를 읽고 편집하며 지내고 있다.
지난 4월 18일, 불기 2568년 부처님오신날 아시아문화전당 봉축탑 점등식에 다녀왔습니다. 올해 봉축탑은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입니다. 강진 월남사지는 갈 때마다 항상 인적이 드물어서, 깨끗하게 정돈된 만큼이나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습니다. 그래도 홀로 선 삼층석탑이 넉넉하게 반겨주니, 뒤로 보이는 월출산의 비경과 어우러져 처연한 아름다움이 가슴 속 깊이 파고 들곤 했습니다. 이제 강진 월남사지의 삼층석탑이 호남의 심장에 우뚝
모든 생명은 본능적으로 ‘나’라는 존재가 실재한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신과 기억하고 인식하는 마음을 자기 자신으로 삼고 살아가려는 생명들의 의지는 너무도 당연한 자연법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나는 실재한다’라는 보편적인 관점에 대해 놀랍게도 강력한 제동을 걸고 있다. 이른바 부처님 말씀 가운데 생명의 구조와 본질을 밝힌 오온설(五蘊設)이 그것을 잘 뒷받침해 주고 있다. 불교에서는 우선 생명의 구조는 다섯
마음의 평화, 행복한 세상 불기 2568년 갑진년의 초파일 표어는 ‘마음의 평화, 행복한 세상'(Peace of Mind, Happiness of the World)입니다. 부처님오신날 봉축위원회는 “올해 봉축표어에는 수행과 명상을 통해 불자와 모든 국민이 마음의 평화와 정신 건강을 지키고, 사회적 정진을 통해 행복한 세상을 이루어 가자는 의미를 담았다.”라고 밝혔습니다. 마음이 평화로우면 세상이 행복으로 가득 찬다는 의미인 듯합니다. 그런데 전달하고자
곧 부처님 오신 날이다. 기쁨이 가득한 하늘나라가 수없이 많은데, 부처님은 왜 자진해서 고난이 가득한 사바세계로 오셨을까?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이 아니면 아마 불가능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현우경>>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부처님께서 전생에 보살행을 닦던 시절 이야기이다. 아득한 옛날, 염부제를 다스리던 큰 나라에 마하라단낭(摩訶羅檀囊)이라는 왕이 있었다. 그에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첫째는 마하부나녕(摩訶富那寧), 둘째는 마하제바(摩訶提婆), 셋째는 마하살타(摩訶薩埵)였다. 막내 마하살타는 어려서부터
옛날, 문수보살이 동방에 머무르고자 서역의 월지국(月支國)을 지나 영암의 진산에 머무셨는데 월지국의 월(月)과 월지국에서 출발했다는 출(出)자를 써서 ‘월출산’이라 명명했다고 전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월출산을 일러 ‘본국 밖(국외)에서는 화개산(華蓋山)이라 칭한다’고 했다. ‘국외(國外)’는 중국을 뜻하며, 화개산은 월출산을 말한다. ‘영암지도갑사사적’에는 ‘옛날 문수보살이 처음 이곳에 왔을 때 구름이 항상 산의 제일 높은 곳에 떠 있으므로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 화개산이라 부른다’고 했다. 문수보살이
흔히 가정집과 식당에 걸려있는 유명한 글귀인 ‘상락아정(常樂我淨)’은 『열반경』에 나오는 말씀으로 불교의 이상 세계인 열반이 지닌 네 가지 큰 덕을 말합니다. 첫째, ‘상덕’은 부처님이 누리시는 열반의 경지는 ‘항상하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하기에 생겨난 것은 반드시 없어지고 태어난 것은 언젠가는 죽습니다. 우리 중생계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유한의 세계입니다. 하지만 열반의 세계는 나고 죽음을 벗어난 영원,
뭘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길을 걸어도 머릿속에 걱정과 근심이 떠나질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무거운 바위처럼 마음을 짓누르는 근심 걱정은 물먹는 하마처럼 온갖 생각들을 빨아들여, 다른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합니다.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을 당장 내려놓고 싶지만 말처럼 쉽게 되질 않습니다.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겁고 힘들 때, 누구라도 붙잡고
2019.07.05 초사흘법회 “행위만 있고 그 행위를 하는 주체는 없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가장 핵심인 무아(無我)사상입니다. 다시 한번 용수 보살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기에 초가 있다고 합시다. ‘A라는 초’가 탄다고 할 때 허공에 바로 불이 짠 나타나서 A 초 심지에 붙고, B, C 초로 옮겨가고, 심지가 다 탈 때쯤 되면 불이 다시 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