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묵당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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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문화전당 광주봉축탑 점등식에서

지난 4월 18일, 불기 2568년 부처님오신날 아시아문화전당 봉축탑 점등식에 다녀왔습니다.   올해 봉축탑은 강진 월남사지 삼층석탑입니다. 강진 월남사지는 갈 때마다 항상 인적이 드물어서, 깨끗하게 정돈된 만큼이나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내곤 했습니다. 그래도 홀로 선 삼층석탑이 넉넉하게 반겨주니, 뒤로 보이는 월출산의 비경과 어우러져 처연한 아름다움이 가슴 속 깊이 파고 들곤 했습니다.   이제 강진 월남사지의 삼층석탑이 호남의 심장에 우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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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열심히 기도하기 바랍니다

뭘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길을 걸어도 머릿속에 걱정과 근심이 떠나질 않을 때가 있습니다. 무거운 바위처럼 마음을 짓누르는 근심 걱정은 물먹는 하마처럼 온갖 생각들을 빨아들여, 다른 생각은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합니다. 근심 걱정의 무거운 짐을 당장 내려놓고 싶지만 말처럼 쉽게 되질 않습니다.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이 무겁고 힘들 때, 누구라도 붙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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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오는 길목에서

복을 빌면, 그 복을 나에게 주는 존재는 내가 아니다. 신이든 초자연적인 절대자이든 누군가 나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나 복을 짓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는 능력 혹은 가능성을 내 안에 쌓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나에게 복을 주는 것이다. 복을 빌면 내가 복을 받을지 못 받을지는 전적으로 내가 아닌 복을 주는 다른 존재에게 달려있다. 내가 열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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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생의 출발선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은 단연 “스님은 왜 출가하셨나요?” 입니다. 매번 한결같이 같은 질문을 받다 보니 식상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출가의 계기를 묻는 이 질문은 지금의 내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환기시켜주고 있습니다.그런 탓일까요? 최근 들어 왜 출가했는지 가끔 자문하곤 합니다. 그리고. 당시의 감정과 느낌을 소환해서 온전하게 느껴보려고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그때의 결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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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심사 가는 길

다만 ‘길’이라는 이름을 지닌 땅에 불과할 뿐입니다. 숲 속의 제왕 코끼리는 스스로 길을 만듭니다. 또 치문에 이르기를 “장부는 스스로 하늘을 찌를 듯한 의지를 가져, 설령 여래가 걸어간 길일지언정 나의 길이 아니면 가지 않는다.” 하였습니다.가지 않은 길은 길이 아닙니다. 길은 항상 나의 뒤에 존재합니다. 가지 않은 길에 연연해 하는 것은 있지도 않은 연인을 그리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새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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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가득한 적묵당의 만추

출가를 결심하고 했던 가장 큰 일은 미루고 미루던 치과 치료를 시작한 것이었습니다.출가하면 다시는 세상 구경 못 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치과 치료의 두려움을 이긴 셈이지요. 상당한 숫자의 충치가 있었고, 빼야 할 사랑니도 3개나 있었습니다. 모든 치료를 2달 안에 끝내달라고 하니 의사는 도대체 이해불가하다는 표정으로 어디 멀리 가냐고 물어보던 기억이 나는군요. 무리해서 급하게 진행했지만 2달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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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

어제는 남해 보리암으로 가을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이른 아침 출발하는 버스 안에서 비구니 스님이 염불하는 천수경을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들은 제대로 된 염불이라 매우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출발하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금방 차분하게 가라앉고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문득 아주 오래 전 일이 생각났습니다. 중학교 무렵,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집에서 종종 염불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부모님 중 한 분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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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개고(一切皆苦)

지금으로부터 2,500여 년 전, “일체개고(一切皆苦)”,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고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당시 한반도는 고조선 시대로, 변변한 유적이나 기록조차 없던 시절입니다. 상상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까마득히 먼 옛날입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은 하루 하루 먹고 사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인도의 극단적인 열대성 기후를 감안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당시 인도 사람들에게 매우 피부에 와닿는 주장이었을 것입니다. 그후, 2,000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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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지나간 무등산 새인봉

집중호우, 살인적인 폭염 그리고 다시 태풍입니다.뭐 하나 얌전히 지나가는 것이 없습니다. 과거 우리들의 업이 고스란히 과보가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이 와중에 산비둘기 두 마리가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뭐라도 먹을 게 있나 싶어 풀밭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인간들이야 인과응보라지만 저들은 단지 우리들과 같은 시공간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기후의 변화가 격렬할 수록 참회하는 마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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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 영가등

누구나 한번은 죽습니다. 문제는 지금 생에서 죽음은 단 한번 뿐이라는 겁니다. 살면서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죽을 뻔한 경험은 할 수 있어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살아서는 경험할 수 없으니 산 사람은 죽음에 대해 결코 알 수 없습니다. 알 수 없으니 두려울 수 밖에요. 두려우니 어떻게든 죽음을 내 뜻대로 지배하려는 욕망이 일어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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