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묵당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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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하의 증심사

저는 지금 증심사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만, 사실 증심사 어디에도 증심사는 없습니다.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가리킬 수 있는 그 무엇.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고, 두드리거나 흔들면 소리도 나는 그 무엇으로서의 ‘증심사’는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기와, 나무, 흙, 꽃, 법당건물 같은 것들 뿐입니다. 이렇게 따지자면 ‘삼성’같은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이비통’같은 명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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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 오층석탑과 칠층석탑

오백전 옆 두 개의 석탑에 오후의 햇살이 길게 드리우고 있습니다.‘저들은 저곳에서 얼마나 많은 석양을 보았을까?그 각각의 일몰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저기에 붙박혀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것을 지켜보았을까?’말없이 서 있는 석탑을 보며 생각합니다. 증심사는 9세기 중엽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1,20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오층석탑의 창건시기는 고려시대, 칠층석탑은 조선시대라 합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증심사를 터전 삼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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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불자란?

일본의 가장 큰 종파라는 정토진종은 오직 ‘나무아미타불’만 외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심지어 또다른 종파인 일련정종은 ‘나무묘법연화경’ 이 일곱글자만 외면 만사형통입니다. 선종의 전통을 내세우는조동종은 좌선만을 강조합니다. 일본에서는 갓난 아이가 태어나면 먼저 신사의 신들에게 신고하고, 결혼식은 기독교의 교회나 호텔에서 올리지만, 장례는 사찰에서 불교식으로 합니다. 또 일본의 부자는 무덤이 3개라고 합니다. 하나는 다니던 사찰에, 또 하나는 고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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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종각. 흐트러진 기와

범종각 기와가 흘러내렸습니다. 혼자서 그리한것은 물론 아닙니다. 지난겨울 역대급 폭설의 흔적이지요. 무거운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기와가 제 모양을 잃고 흐트러졌지만, 추운 날씨는 흐트러진 상태를 그대로 붙잡아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낮 동안 영상의 날씨가 이어지면서 얼어붙었던 것들이 하나둘 녹기 시작했습니다. 동장군에 붙잡혀 있던 기와도 중력에 이끌려 아래로 흘려 내리고 있습니다. 벌써 가장자리는 떨어져 버렸습니다. 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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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

한 여인이 진열대를 엎고 맨발로 바닥에 드러눕는 등 백화점에서 난동을 부렸다고 합니다. 짝퉁을 팔아 불만이어서 그랬답니다. 또 어떤 이는 비닐봉투를 주지 않는다고 편의점으로 차를 몰고 돌진했습니다. 최근, 템플스테이에 오신 분들이 이틀 연거푸 제게 외로움을 토로하고는 돌아갔습니다. 한두마디 말로 풀어질 응어리가 아니었습니다. 피곤을 한보따리 짊어지고 돌아와, 혼자 누운 밤이 뼈가 시릴 정도로 외롭다면, 낮 동안의 약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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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좋은 날이다

계묘년이 밝았습니다.운문 스님이 대중들에게 묻기를, “보름 전의 일에 대해서는 묻지 않겠으니 보름 이후의 일에 대해 말해보아라.”아무도 답하는 이가 없자, 스스로 답하기를“날마다 좋은 날이다(日日是好日)” 보름은 깨달음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운문 스님은 깨달음 이후의 삶은 어떠한 지 물어보는 것이겠지요. 모든 날들이 다 좋은 날이면 그것이 과연 좋은 것일까요?좋다는 것은 나쁘다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좋다고 할 수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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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기우제문 無等山 祈雨祭文

신명과 사람의 사이, 하나의 이치로 감통하니 성정의 좋아하고 싫어함이 거의 차이 없습니다. 우리 사람을 기쁘게 하여 모두 신명의 공덕에 춤을 춘다면, 신명이 기쁠 뿐만 아니라 상제께서도 훌륭히 여길 것입니다. 진실로 병들고 파리하여 탄식하거늘 신령의 은혜 끝까지 내려 주지 않으시어 사람들 머리 아파하며 모두 호소하는데 어찌 신령께서 들어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중략) 지난 기근 겪은 지 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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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심사 가을 풍경

세상에서 제일 쉬운 일은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다음으로 쉬운 일은 내 맘대로 할 수 있지만 그냥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 다음으로 쉬운 일은 여러 감정들을 동원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고 어쨌든 내 맘대로 하는 일입니다. 여러 감정이란 분노, 애원, 동정심을 유발하는 처량함 같은 것들이 되겠지요. 그 다음으로 쉬운 일은 다른 것들의 도움을 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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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

꽃이 매달린 채 시들어가고 있었습니다.매달린 채 시들어가는 걸 마냥 지켜볼 수도 없어서,시든 꽃들을 잘라 접시에 담았습니다. 누구를 향한, 무엇을 위한 기도인지 모를 기도를 했습니다.접시에 소복하게 담긴 꽃들이 기도를 합니다.시든 꽃들이 나의 마음을 빌려 기도합니다. 기도는 오로지 기도를 위한 기도일 뿐입니다.기도는 찰나이며,기도는 과정이며,기도는 마음일 뿐,기도는 그 무엇도 아닙니다. 기도하는 마음만으로 우리는 충분히 아름답습니다.아름다운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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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없는 날

오랜만에 일 없는 날.“오후 내내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다.”라고쓰고서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래저래 한 일이 많아서지우고 고쳐 쓰고 있습니다.정말 오랜만에 해가 나와서 빨래해서 빨랫줄에널기도 하고, 방도 쓸고, 주인 없는 옆방 환기도 시키고,머리도 깎고, 책장의 책들을 정리하다가책 한 권을 골라 아주 천천히 읽기도 하고…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그냥 눈에 띄어서 몸이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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