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사람들은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을 부처님 세계로 여겼다. 골골이 산천에 붙여진 땅 이름이 부처님 세상의 주소이다. 호남 최대의 도시 광주도 그러하다. 광주(光州)는 순 우리말로 ‘빛 고을’이다. 백제 때 노지(奴只)라 했고 신라 때 무진(武珍), 무주(武州) 등으로 불렀다. 후백제때 견훤이 도읍지를 삼으면서 광주(光州)라 부르기 시작해 고려초에 널리 퍼진 것으로 보인다.
‘광주(光州)’라는 땅이름이 처음 기록된 것은 고려 태조 23년(940)이다. 그 후 기록이 없다가 고려말 대학자인 목은 이색의 석서정기(石犀亭記)에 등장한다. 이색은 광주천변 석서정에 올라 ‘빛고을(光之州)은…’이라며 광주천에 관한 이야기를 글로 남겼다. 목은 이색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와 함께 고려 삼은의 한사람으로 성리학의 거두이다.
이색은 어려서부터 당대의 큰 스님으로 추앙 받는 나옹선사와 깊은 교류를 했다. 나옹선사가 열반하고 7주기가 되자 여주 신륵사에서 대장경 발간 불사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처럼 이색은 간화선을 수행하고, 정토사상을 토대로 부처님세상을 펴고자 했던 신심 깊은 불자였다.
그러나 이색은 정치적으로 성리학에 주목했다. 정도전을 비롯해 조선을 건국한 신흥사대부 대부분이 그의 제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색은 조선시대 내내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 배향하지 못했다. 성리학의 기풍을 세우는데 큰 역할을 했지만 대장경을 발간한 불자였기 때문이다.
이색은 유불일치(儒彿一致)를 주장하며 생활 속에 불교를 실천하고 널리 펴고자 힘썼다. 신심 깊은 이색은 광주 인근 장성 백양사, 순천 송광사를 참배하고 글을 남겼다. 광주를 지나면서 ‘빛 고을’에 특별함을 보였다. 그때는 불교가 정치, 사회를 이끄는 시기로 지역민들은 광주 땅을 아미타부처님이 상주하는 극락으로 여겼다. 빛(光)은 아미타불을 상징한다.
서방정토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의 또 다른 이름이 무량광(無量光) 또는 무량수(無量壽)이다.본래 아미타불은 산스크리트어 아미타바(Amitabha, 無量光)와 아미타유스(Amitayus, 無量壽)를 소리 나는 대로 음사한 것이다. 사찰 전각가운데 무량광전, 무량수전은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부처님 집이다. 다시 말해 빛고을은 아미타부처님이 상주하는 극락고을인 것이다.
지금도 광주에는 극락고을임을 보여주는 땅이름이 많이 남아있다. 광주 동쪽에 ‘비할 바 없이 높다’는 뜻의
무등산(無等山)이 있다. 견줄 바 없이 높은 분은 부처님 한분이다. 그래서 ‘무등’은 부처님을 상징하며 무등산은 부처님 산이다. 서쪽에는 광주와 송정리가 맞닿는 곳에 극락원이 있었다. 지금 서창지역으로 이곳에 다리가 놓여있다. 극락교이다. 남쪽에 자리한 금당산(金堂山)의 ‘금당’은 부처님을 의미한다.
이렇듯 광주는 부처님이 상주하는 고을이니 극락세상이라 하겠다. 이밖에 광주에는 염주동, 서방시장, 절골(사동), 방하동, 극락원, 극락평 등 불교지명이 많이 남아있다. 광주 북쪽 입구에는 극락강이 흐른다. 극락강을 건너면 아미타 부처님이 상주하는 극락고을 빛고을(光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