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라는 종교는 따지고 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불교의 핵심적인 사상은 ‘나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인도 전통 사상에서 ‘나는 거짓된 나이며 진실된 나는 아트만이다’라고 한다. 인도 사상에서 ‘나’는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다. 그 다섯 가지는 ▲음식 ▲호흡 ▲마음 ▲지성 ▲환희다. 숨(호흡)은 밥 속에 존재하고, 마음은 숨 속에 존재하며, 자아는 지성 속에 존재한다. 밥이나 숨이 진실이라면 자아는 진실의 진실이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는 육신 속에 생명으로써의 내가 내재해있고, 생명으로써의 내 안에 보고 듣고 느끼는 마음으로써의 내가 있고, 그 마음 안에 생각하고 듣는 즉 인식 작용하는 내가 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일체된 경지에서 느끼는 진실된 내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렇게 인도 전통사상에서는 ‘아트만’이라고 하는 존재를 상정하고 있다. 아트만이란 자신과 구별되는 타자를 갖지 않는 단일한 주체이므로 차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다. 이를테면 ‘나’라고 이야기하는 순간 ‘나’는 ‘나 아닌 다른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트만이라고 하는 것은 나 자신과 구별되는 나 아닌 타자를 갖지 않는다.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불교에서도 익숙하다. 나와 남을 구별하는 분별심을 내지 말라고 하는 불교의 언어가 실은 불교 고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미 당대의 인도사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아트만은 인식될 수 없으므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라는 부정을 통해서만 드러낼 수 있다. 왜 인식할 수 없는가? 인식한다는 말 속에는 이미 주체와 객체, 주관과 객관을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명도 불교의 언어와 유사하다.
불교와 전통 인도사상의 차이는 세 번째 아트만의 정의에서 나타난다. 인도 전통사상에서 아트만은 설명될 수 없더라도 다른 모든 것을 설명하는 근거가 되므로 궁극의 자아의 존재 자체는 부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무언가 궁극적인 것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空)하다고 이야기 한다. 공하기 때문에 분별할 수 없다, 공하다는 말은 연기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전통사상에서는 무언가가 있고, 그 무언가는 단일한 실체이기 때문에 말로 표현할 수 없고 인식할 수 없지만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본질을 무엇인가? 베단타 학파의 전변설이 인도 사상의 주류이다. 이들은 ‘한 덩이의 진흙을 앎으로써 진흙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알게 되나니, 그것들은 다만 말로부터 비롯된 명칭의 변화일 뿐, 진실은 진흙덩이 다만 그것뿐’이라고 주장한다. <금강경>의 핵심논리와 비슷하다. <금강경>에서는 ‘A는 A가 아니라 다만 그 이름이 A일 뿐이다.’라고 말한다.
불교와의 차이는 두 번째 정의에서 갈린다. 베단타 학파는 ‘말로 표현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인해 말이 표현될 수 있고, 마음에 의해 사유되지 않지만 그것으로 인해 마음이 사유할 수 있으며, 눈으로 볼 수 없지만 그것으로 인해 눈이 볼 수 있으니, 브라흐만은 세상사람들이 예배할 대상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근원적인 실제, 아트만이라는 것을 말로 표현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지만 아트만이 있으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내 마음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주체에서 표현하면 아트만이고, 세계를 이루는 본질 즉 객체의 입장에서 표현하면 브라흐만이라는 이야기다. 명칭과 형태를 달리할 뿐 본질은 동일하며 브라흐만이 곧 아트만이라는 것이 전변설의 핵심이다. 세계의 차별은 명칭과 형태에 근거할 것일 뿐, 궁극적으로는 브라흐만의 변화된 모습이며 결과는 원인과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인중유과설과도 궤를 같이 한다.
이러한 사상에 의하면 브라흐만은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순수 그 자체인데, 어떻게 그 안에서 하늘, 물, 땅과 같은 차별적인 세계가 나오는 것일까? 다만 환영일 뿐일까? 새끼줄이 뱀인 줄 알고 깜짝 놀라는 사람에게 뱀은 실제 존재한다. 다만 새끼줄인 것을 알아차리기 전까지 말이다. 새끼줄에 대한 인식이 부재하는 한 뱀은 결코 환상이 아니다. 인도사상에서는 세계도 브라흐만이라는 존재에 대한 자각 없이는 실재하는 것이다.
이 같은 인도사상에 부처님은 어떻게 반박했는가? 다시금, 공이다. 어떠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얽히고설킨 그물망일 따름이더라 라는 것이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수행자가 깨달은 것이다. 브라흐만이나 아트만이라는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고 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관찰하면 실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이 초기불교 논리의 핵심이다. 두 시간에 걸쳐서 부처님이 어떻게 인도의 전통사상을 반박하고 당대의 바라문을 비판했는지를 살펴봤다. 무수한 변화를 거듭한 불교의 원형, 즉 초기불교에 대한 이해를 도왔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