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불교 일본불교 그리고 우리불교 (2)

절4. 평등원

여행 둘째날은 아미타 극락세계로 시작한다. 1052년 조성한 평등원(뵤도인)이다.

첫날 여행이 아스카-나라시대 사찰 답사였다면 둘째날부터는 헤이안시대부터 시작해 가마쿠라막부, 무로마치막부시대 등 일본고유의 불교가 꽃피었던 흔적을 찾아간다. 한나절 동안 다섯 곳의 절을 참배해야 하는 날인만큼, 답사단은 일찌감치 이동을 시작해 채 문이 열리기 전인 뵤도인 매표소 앞에 도열하여 일등으로 입장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입장을 허락하는 직원들. 소박한 크기의 뵤됴인 남문이 답사단을 맞이한다. 꽃봉오리를 밀어 올린 매화가 멀리 봉황당 처마와 어우러진 모습에 일행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찰칵찰칵.

뵤도인은 사(寺)가 아니라 원(院)이라는 한자를 쓰지만 엄연한 절이다. 당초 별장으로 지어진 것을 사원으로 개축하여 창건한 후 다음 해인 1053년 아미타부처님을 안치한 극락전을 건립했다. 이 극락전이 그 유명한 봉황당이다. 경전에 묘사된 극락정토 궁전의 모습을 물과 모래톱과 평교, 홍예교 등의 장치를 이용해 구현했다. ‘고도 교토 문화재’ 중 하나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마침 바람 한 점 없는 맑은 날씨. 봉황당을 둘러싸고 있는 호수 표현이 잔잔했다. 붉고 푸른 봉황당의 자태가 수면 위에 데칼코마니처럼 그려져 있다. 멀리 보이는 법당 안 부처님의 모습은 그 실루엣만 보일락말락. 연못 건너에서 보기엔 어두침침해 보이기만 하는 저 법당 안은, 실은, 헤이안 시대 후기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되어 있다. 주불인 아미타여래좌상 주위로 아미타 부처님이 연화세계로 인도하는 모습을 표현한 구품내영도와 극락정토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미타 부처님을 둘러싸고는 52구의 운중공양보살상이 춤춘다. 선녀와 동자, 날아오르는 봉황과 갖가지 장식들이 아미타 극락세계의 즐거움을 대변한다. 닫집 중앙부 천장에는 66개의 청동거울이 달려있다. 전각 안으로 해가 들어올 때, 거울에 반사된 빛들이 운중공양보살님들과 함께 춤을 추리라.이 절을 지은 사람들은 그 빛의 향연으로 하여금 중생들에게 극락의 존재를 증명하려 했던 모양이다.

일본인 참배객들은 하루에 단 한 번, 오전 9시 30분에만 개방하는 극락전 내부를 참배하기 위해 이미 줄을 선 참이다. 우리 답사단은? 봉황당보다 봉상관(호쇼칸)을 택했다. 뵤됴인의 성보박물관이다. 봉황당 내부를 영상물로 설명해 놓은 미디어관으로 봉상관은 시작한다. 앞서 궁금증을 자아냈던 화려한 봉황당 내부의 모습을 영상을 통해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운중공양보살상. 봉황당 법당 부처님 곁을 장식하고 있던 구름 탄 보살님들을 이곳에 모셔 두었다.  26구의 운중공양보살상은 제각기 편안한 자세와 얼굴로 자유로운 몸짓을 하고 있다. 악기를 든 보살님도 있고 춤을 주고 있는 보살님도 있다. 장식과 기법과 년도를 떠나 가장 편안하고 정다운 자태에 스물 여섯 분 모든 보살님의 얼굴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봉상관에서 만날 수 있는 또 다른 유물은 봉황당이 건립된 당시에 만들어진 봉황 한 쌍이다. 현재는 같은 모양으로 제작해 금칠을 한 봉황이 봉황당 용마루에 앉아 있고, 원본은 박물관에 들어와 있는 것. 관음당 본존인 십일면관음입상과 봉황당 남쪽 종루에 달려있던 범종도 이곳 봉상관에 있다. 봉상관을 돌아 나오는 길, 운중공양보살님들의 면면을 담아 놓은 도록 한 권 사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절 5. 동복사

말 그대로 ‘교토스러운’ 골목을 싸복싸복 걷다보면 동복사(도후쿠지) 입구에 이른다. 참선하고 수행하는 스님들이 익숙한 한국의 불자들에게 동복사는 ‘선종 사찰’이라는 수식어로 친근함을 유발한다.

도후쿠지는 임제종 대본산이자 교토 5대 선종사원 중 하나다. 당초 헤이안시대에 귀족 가문의 씨사찰로 건립된 후 가마쿠라막부 시대에 선종 사찰로 중창됐다. 대대적인 중창불사를 하면서 나라의 고찰인 동대사와 흥복사의 ‘동’자와 ‘흥’자를 각각 따와 동복사라 이름했다고 한다.

가마쿠라막부는 기존의 불교보다 중국에서 새롭게 들어온 선종을 더 지지했다. 이에 삼문, 법당, 방장, 고리(종무소), 선당, 동사(화장실), 욕실로 구성되는, 선종사찰의 전통인 7당 가람 양식으로 절을 지었다.

일행은 먼저 국보이자 일본 사찰의 삼문 중 가장 오래된 고후쿠지 삼문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답사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찰에 산문과 일주문이 있다면 일본 사찰에는 삼문(三門)이 있다. 공문, 무상문, 무작문 등 해탈에 이르기 위한 세 단계를 일주문 형태로 형상화한 것이다. 삼문의 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선당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선방으로 한때는 500명 이상의 스님들이 수행했던 때도 있었다고.

삼문에서 지나오는 길에 동사(해우소)에 들렀다. 일본에서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선종 사찰의 화장실이라고 한다. 화장실이 무에 그리 중요하다고 문화재로 남겨두었을까?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화장실 역시 수행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배설물이 퇴비가 되어 대중을 먹여 살릴 텃밭으로 돌아가는 것. 텃밭의 작물들로 하여금 몸을 지탱하는 약으로 삼고 또 다시 배설하게 되는 것. 그러한 순환의 이치가 작동한다고나 할까. 그렇다 해도 ‘똥간’을 들여다보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은, 중생의 마음을 발견할 뿐이었다.

고후쿠지의 상징은 방장스님이 기거하던 방장채의 정원인 팔상정원이다. 방장정원은 다른 사찰에도 있지만, 방장채를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면에 정원을 만든 것은 고후쿠지 뿐이라 한다. 팔상정원은 일본 고유의 정원 양식인 ‘가레이산스’ 기법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가레이산스는 헤이안시대 이후 중국 선종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정원 양식으로, 물 없이 바위와 모래, 이끼 등을 통해 정원을 장식하는 것이 특징이다. 땅에 자갈을 깔고 홈을 파서 마치 물결과 같은 무늬를 만들어낸다. 동그랗게 퍼지는 물의 파동이나 파도, 직선을 구현하기도.

실은 내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정원보다 좋았던 것은 방장 자체의 고즈넉함이었다. 삐걱거리는 마루를 밟고 건물을 한 바퀴 빙 돌 수 있는 자유로움. 정원을 향해 난 마루에 발을 뻗고 앉아 삼삼오오 이야기를 하는 풍경.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과 일행의 얼굴을 스쳐가는 웃음기. 답사하는 사찰 중 거의 유일하게, 사찰이라는 객체를 대하는 주체로써가 아니라 객체와 주체가 하나된 순간이라 여겨졌다. 자갈 가운데 솟은 바위들처럼 방장 마루 곳곳에 자유롭게 앉은 순례객들이 모두 원래 거기에 있던 하나의 섬처럼, 바위처럼 보이는 순간이었다.

한편 동복사는 우리나라 신안과 인연이 있는 사찰이기도 하다. ‘신안 앞바다 보물선’이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 있을 거다. 1975년 8월, 신안의 어부들이 그물에 딸려 나온 도자기를 발견한다. 신안군청의 감정 결과 도자기는 중국 송나라, 원나라 대의 유물. 이에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이 합동조사단을 꾸렸다. 1976년부터 장장 10년간 수중발굴작업이 진행됐다.

보물선에서 나온 보물들은 모두 2만4천여 점. 이 중 2만여 점이 도자기와 토기류였다. 목간(나무패)에 쓰인 글씨를 분석한 결과 보물선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향하다가 고려 인근에서 침몰한 것으로 밝혀졌다. 목간에서는 ‘도후쿠지’라는 언급도 있어, 비슷한 연대에 진행된 도후쿠지 사찰 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우리 일행에게는 다소 한적한 도후쿠지였지만 가을이 되면 발 디딜 틈 없이 붐빈다고 누군가 전해주었다. 와운교와 통천교. 마주보는 두 다리 사이가 온통 단풍나무다. 그러고보니 언젠가 인터넷으로 본 빨간 단풍 풍경이 떠오를 것도 같다. 통천교 중간에서는 일본 전통 복장을 한 남녀를 ‘구경’할 수 있었다. 아마 결혼사진을 촬영하는 듯했다. 촬영 작가가 한 명, 보조하는 사람이 두 명. 신랑 신부의 모습을 찍어 되겠냐고 하자 고개를 끄덕인다.

절6. 33간당

33간당(산주산겐도)는 1164년 건립되고 1266년에 재건된 단일건물이자 천불당이다. 전각의 길이 120미터. 우리나라 종묘보다 9미터가 더 길어 세계에서 가장 긴 목조건축물이라는 수식어를 들고 있기도 하다. 전각 정면의 기둥과 기둥 사이가 33칸으로 나누어져 있어 33간당이라는 별칭이 붙은 것이고, 이 절의 정식 명칭은 연화왕원(렌게오인)이다.

산주산겐도는 천수관음보살님들의 전각이다. 주불과 주불의 양옆으로 도열한 1,000분의 관세음보살. 모두 같은 팔을 가지고 있고, 모두 같은 보관을 쓰고 같은 의상을 입고 있지만, 모두의 얼굴이 미묘하게 다르다. 천 한 분의 부처님 속에서 자신과 닮은 얼굴 하나쯤은, 혹은 너무나 그리워하는 사람의 얼굴 하나쯤은 만나게 될 거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듯하다.

산주산겐도 입장을 앞두고 “감탄은 속으로만 하세요!” 라는 주의를 미리 받았다. 그럼에도 감탄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 사람 키만한 관세음보살님들이 몇 열로 도열하여 선 모습에서 압도감을 느꼈다.

중앙의 주관음인 11면 천수관음좌상과 양 옆으로 각각 줄을 선 500분의 관세음보살. 국보인 중앙의 본존보살은 유명한 불상 조각가 단케이가 82세 때 만든 작품으로 가마쿠라 시대의 명작이라고 평가받는다. 다만 화재로 인해 본존의 머리와 손 일부는 헤이안시대의 것, 몸통 부분은 가마쿠라시대에 보수한 것이라고.

천 한 분의 보살님들은 ‘요세기즈쿠리’라 하는, 신체의 여러 부분을 따로 만든 뒤 조립한 방식으로 제작됐다. 머리 위에는 1개의 얼굴이, 몸통에는 40종의 팔이 붙어있다. 1001개의 등신입상 중 124구는 당건 당시인 헤이안 시대의 작품이고, 나머지 800여 구는 가마쿠라 시대의 재건 때 16년에 걸쳐서 복원했단다.

1001분 보살님의 도열에 압도당하는 것도 잠시, 순례객들의 시선은 이내 맨 앞줄에서 보살님들 호위하고 있는 수호대중에게 쏠린다. 모두 같은 포즈의 정적인 보살님보다 각기 다른 포즈에 역동적인 표정을 하고 있는 탓이다. 관음상 앞줄과 중존의 사방에 위치한 28구의 국보 불상들은 천수관음과 불자들을 수호하는 신들의 모습으로 박진감 있게 표현됐다.

특히 이들 28부중상과 눈을 마주치면 그 현실감이 놀라움을 감추기 어려운데, 눈동자를 수정으로 만들어 끼워넣는 옥안 기법을 사용해서 그렇단다. 단의 끝과 끝, 한층 높은 운좌에 올라 있는 풍신과 뇌신상 역시 일본불교에서 강조되는 신들의 모습이다.

본존보살 인근에서는 직원들이 테이블 앞에 앉아 신행을 돕는다. 초를 올리거나 도첩에 도장을 찍어주는 등이다. 휠체어에 탄 노모를 모시고 법당을 참배하던 일본인 관광객이 직원에게 동전을 건네고 유성펜을 받아들었다. 키다란 초에 적어내려가는 소원은 아마도 노모의 건강 발원, 가족의 행복 발원이었을 것이다.

법당을 돌아나오는 길에는 ‘활’에 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산주산겐도의 서쪽면에서는 에도시대부터 현재까지 일 년에 한 번 토오시야라는 활쏘기 행사가 열린다. 전에는 길게 늘어선 산주산겐도 툇마루에서 활쏘기 대회를 했다고 하는데, 요즘에는 서쪽 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버드나무 새순이 흐드러지고 있는 산주산겐도에서 봄의 정취에 젖었다가 곧 걸음을 옮긴다.

절7. 서본원사

교토 시내에 으리으리한 절이 있다. 버스 주차장에서 뒷문을 통해 들어선다. 우리나라로 치면 종무소 같은 전도본부 건물이 따로 있고, 신행생활을 돕는 서점이 따로, 중앙유치원도 운영하고 있다. 대웅전 격인 조사당(고에이도)과 아미타당이 복도를 통해 연결되어 있고, 마당을 건너 일주문 밖은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심 한복판이다.

서본원사는 가마쿠라시대 중엽에 신란쇼닌 스님이 개창한 정토진종 본원사파 본산이다. 제11대 종주인 젠뇨쇼닌 스님 대에 현재 교토 자리에 본산을 세운 듯하다. 이곳 서본원사도 고도 교토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도심 한복판, 일반인들이 자유롭게 참배할 수 있도록 하는 절이라는 점에서 서울 조계사가 떠올랐다. 마침 아미타당에서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예닐곱살 먹은 어린이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고, 지도선생님이 아미타부처님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정장 차림의 학부모들은 아이들의 뒷열에 앉아있다. 유치원 입학식 같은 분위기다.

더욱이 이런 모습을 관광객들도 자유롭게 드나들며 참관할 수 있다. 꽤나 ‘전도’에 적극적인 모습이다. 서본원사의 역사와 유래, 경내 지도가 첨부된 한글 안내문도 본격적이다. 안내문에 따르면 정토진종의 교의는 “아미타 여래의 본원력에 의해 신심을 얻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하는 인생을 살아가며, 이 세상에서의 인연이 다할 때 정토에 태어나 부처가 되고, 다시 이 미혹한 세상에 돌아와 사람들을 교화한다”는 것이다.

정토진종의 생활 지침도 정해져 있다. “신란성인의 가르침에 따라 아미타여래의 서원을 듣고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을 하면서 항상 내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고, 참회와 환희심 속에서 현세의 기복 등에 의지하지 않고 늘 감사하며 은혜에 보답하는 생활을 한다.”

도량에서 길만 건너면 숙박과 식당 등을 겸한 문법회관, 교학전도연구센터, 불교종합박물관, 국제센터 등이 인접해 있다. 우리 일행이 떠날 때쯤 어린이들은 본당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배경삼아 우리 일행도 기념사진 한 방. 절이라기보다 대형교회와 비슷한 느낌이라는 스님의 소감과 함께, 현대 일본 불교의 신행과 전도상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절8. 청수사

교토의 상징 청수사(기요미즈데라)는 그야말로 한창때의 경주 불국사를 떠오르게 한다.

주차장에서부터 절로 향하는 오르막길, 이삼미터 남짓의 좁은 골목 양옆으로 자그마한 노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갖가지 음식과 기념품을 판매하고 있다. 지금껏 다녀온 절들에서 보기 어려웠던 외국인 관광객들은 모두 이곳 기요미즈데라에 몰려 있는 것 같다.

그뿐인가? 기모노에 게다를 신고 종종거리며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는 학생들은 어떤가. 저마다 여성스럽게 단장한 머리카락에 구슬장식을 꽂고,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인 메이크업을 한 일본인들이 벚꽃잎처럼 흩날리는 듯했다.

기요미즈데라의 무엇이 이토록 유난스러운 발걸음을 이끄는 것일까? 기요미즈데라는 오토와야마 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다. 관음신앙의 ‘무대’로 예로부터 관세음보살님의 가피력을 바라는 사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기요미즈데라는 본디 귀족가문의 씨사찰이다가 왕실의 원당사찰로 승격되었다. 이후 오닌의 난으로 소실되었다가 후대 쇼군의 원력으로 복원된 헤이안 시대의 대표 사찰이다. 사천왕문 격인 인왕문과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마구간, 종루은 무로마치시대의 것, 나머지 대부분의 전각은 에도시대 건물이라 한다. 당연히 ‘고도 교토 문화재’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 있으며, 가장 최근인 2020년 ‘헤이세이의 대개수’라 불리는 12년간의 개,보수 공사를 마쳤다.

와글거리는 통에 삼중탑부터 자심원을 떠밀리듯 지나 본당에 진입했다. 절벽 위에 지어진 발코니 같은 건물. 헤이안시대 이후 관음신앙이 고조되면서 사람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본당 앞면을 확장하다가 마침내는 공중에 무대를 돌출시킨 형태가 되었다고 하는데, 건물을 떠받치고 있는 것은 수령 400년 이상의 느티나무로 만든 18개의 기둥으로 못 없이 고정되어 있다고 한다.

나라 말기 산악사찰의 가람배치를 그대로 구현한 도량으로, 이곳에서 고구려 건축양식을 엿보는 사람들도 있다. 무대조 건물의 대표작으로 본당은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외에도 15건의 중요문화재가 있다. 본당 본존은 십일면관음보살이다. 보통은 일반에 공개하지 않고 1738년 이후에 33년마다 한 번씩 공개한다.

본당에 이르러 일행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두어 시간 동안 청수사를 참배하고, 내려오는 길목에서 차라도 한 잔 하고, 저 아래 주차장에서 다시 집결하기로 했다. 부처님을 볼 수 없는 본당에서 사람들은 곧장 오토와노타키, 영험한 물로 향한다. 영험한 물은 청수사라는 명칭의 유래가 된 샘물로, 세 개의 수구를 통해 세 줄기의 물이 흘러내린다.

기다란 대나무 바가지로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아 마시면 건강, 연애, 학업이 이뤄지는 영험이 있다고 해 남녀노소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다. 다만 세 줄기의 물을 다 마시면 욕심이 지나치다고 오히려 노여움을 살 수 있으니 하나나 두 개 정도로 만족하라는 팁. 지금은 코로나19의 여파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없었고 단지 대나무 장대를 기울여 손을 씻는 것으로 그쳤다.

본당보다 전망이 더 좋은 곳은 오히려 영험한 물 위편에 자리한 오쿠노인이다. 마찬가지 무대조 건물로, 난간에 서면 방금 지나온 본당의 측면이 더 잘 보인다. 오른쪽으로는 삼중탑과 본당이 어우러져 장관이고, 정면은 교토 시내를 향해 탁 트여 있고, 약간 오른쪽으로는 교토타워를 마주보고 있다.

하산하는 길. 녹차 아이스크림, 파르페, 찹쌀떡, 빵… 갖가지 먹거리가 관광객을 유혹한다. 녹차 파르페를 먹고도 시간이 남아 관광지만큼이나 유명한 스타벅스 청수사점을 구경하고 골목의 끝까지 걸어보았다. 이번 여정에서 아쉽게 제외한 고태사로 가는 팻말이 보였다.

Leave a Comment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