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 운명을 믿습니까? (1)

어떤 사람이 새해를 맞아, 한해 신수를 보려고 용한 점쟁이를 찾아갔습니다. 점쟁이가 하는 말이 “당신은 올해 여름 물에 빠져 죽을 상이니 물가에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초부터 웬 재수 없는 소리”라며 한 귀로 듣고 흘려버렸는데 봄이 오고 날씨가 따뜻해지니 점쟁이 말이 귀에 맴돌아 불안했습니다. 시간이 더 지나고 삼복더위가 찾아오니까 불안한 마음은 더 커졌습니다.

그는 바다, 강, 계곡은 물론이거니와 아예 방 밖으로도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방 안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세숫대야에 코를 빠뜨린 채 말입니다. 점쟁이 말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습니다. 물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별의 별수를 다 썼지만 결국은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음직한 이야기입니다. 운명이라는 게 있다, 숙명 혹은 결정론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를 만든 모양입니다.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

먼저 가정을 해봅시다. 운명이 있다, 즉 모든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미래를 알 필요가 있을까요? 알아도 미래는 결정되어 있고 몰라도 이미 결정되어 있는데 말입니다. 앞선 이야기에서처럼 점괘가 나쁘다고 하면 살아있는 내내 불안하게 살아야 하고,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이미 알고 있다면 시큰둥해져서 차라리 모르는 것만 못합니다. 만약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면, 내가 알건 모르건 상관없이 미래는 이미 결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굳이 힘들게 미래를 알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굳이 미래를 알려고 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닙니다. 만약 미래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혹은 내게 불리하다면 바꾸고자 하는 욕망 때문입니다. 과연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면 미래를 수정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것은 전제조건입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미래를 수정할 수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전제조건에서 이미 미래는 결정되어 있기 때문에, 미래를 수정한다는 것은 곧 전제조건을 부정하는 것이니 애초부터 성립할 수 없습니다. 미래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전제조건 속에 이미 미래는 아무리 해도 수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정된 미래는 없다? 모든 것은 우연이 지배한다.

반면 결정된 미래가 없다고 가정하면 어떻습니까. 결정된 미래가 없다는 말은 곧 시간의 선후관계에 아무런 연관 관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우연히 모든 일이 생긴다는 것과 동일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미래를 알 수도 없을뿐더러, 굳이 미래를 알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현재 내가 하는 어떤 행위도 미래와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즉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노력해서 내가 원하는 미래를 만들 수 있다면, 현재와 미래 간에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이니 역시 성립할 수 없습니다. 우연이 전적으로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신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만약 전지전능한 신이 있어서 이 세계를 만들 때 과거, 현재, 미래가 아무 연관 관계가 없도록 만들었다고 칩시다. 신의 능력을 가지지 못한 인간들이 미래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하지만, 신은 ‘전지전능’, 즉 모든 것을 알고 무엇이든 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미래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신이 미래를 안다고 하면 신은 자기모순에 빠집니다. 자기 자신이 세상을 완전하게 우연이 지배하는 곳으로 만들었는데 어떤 부분은 본인이 미래를 결정짓는 것으로 한다면 본인이 만든 세계를 스스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은 전지(全知)는 하더라도 전능하지는 않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전능(全能)하지 않은 것은 신이 아닙니다. 미래가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에 입각해서 보면, 미래에 대해 알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우연이어서 결정된 미래가 없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1초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는 신도 모릅니다. 신도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다시 말해 결정된 미래가 있건 없건 우리는 미래를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는 것이 논리적으로 증명됩니다.

인과응보는 운명론인가?

불자라면 이 지점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들 것입니다. 불교의 가장 기본적인 교리 중 하나인 인연설과 인과응보 역시 운명론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인연설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인이 있으면 연이 있고 업이 있으면 과보가 있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핵심인 연기를 시간적으로 풀어쓰면 인연설이 됩니다.

가령 A라는 사람이 나쁜 일을 했을 때 분명히 과보가 있다고 한다면 현재와 미래 간에 상관관계가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미 미래가 결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불교의 인연설도 숙명론이나 운명론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연설은 중중무진법계라, 인연의 고리가 마치 그물망처럼 너무나 촘촘합니다. 어떤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일어나는데 부처님도 그것이 몇 월 며칠 몇 시에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연의 고리가 너무나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인과 연의 고리는 분명히 있으나 이 세상은 인과 연의 연관관계가 너무나 촘촘하기 때문에 마치 우연히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능력이 아직 미치지 못해서 상관관계를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뿐입니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과 이것과 저것이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결정된 미래가 있는지 없는지 따지는 것과 부처님의 인과응보 또는 연기사상은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서로 비교할 수 없습니다. 굳이 연기사상에 입각해서 억지로 말한다면 우연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모든 것은 인과 연이 분명하여 상관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오히려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인지 어떤지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결국 나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은 것입니다. 내가 노력한 만큼의 결과가 보장되는지 여부가 궁금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의 가장 큰 맹점은 나의 미래를 좌우하는 가장 큰 변수는 나의 행동이라는 고정관념입니다. 이는 인과 연의 고리는 구름처럼 광대하고 촘촘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나아가 세상사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욕심에서 비롯된 생각입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였습니다.
열심히 노력하되 결과는 하늘에 맡기라는 말입니다.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은 열심히 적극적으로 노력하되 나의 노력은 숱한 변수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명심하고, 나의 운명과 다가올 미래를 겸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연기사상을 올바로 이해하고 있다면 이것이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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