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신문에 70대의 할머니와 50대 남자가 지하철에서 다퉜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다리에 장애가 있는 50대 남자가 교통약자석에 앉아서 가고 있는데 70대의 나이 드신 할머니가 ‘70살도 안 된 게 경로석에 앉아 있느냐’고 호령을 했습니다. 그러자 50대 양반도 ‘내가 교통약자라서, 다리에 장애가 있어서 앉아 있는데 뭐가 잘못됐냐?’ 하면서 싸웠습니다. 결국 경찰까지 출동하고 나서야 합의를 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후속 기사로 전문가들의 진단이 나왔습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냐고 했을 때 전문가들은 교통약자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과 배려가 부족해서라고 진단했습니다. 여기에서 교통약자는 노령자, 어린이, 임산부, 그리고 장애가 있는 사람들 등 서서 가기 불편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전문가들은 교통약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자리가 부족한데다 사회적인 배려가 낮아서 이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에 제도적으로 교통약자들을 위한 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야 된다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이 70대 할머니가 화가 난 것은 교통약자에 대한 인식 부족이 아닙니다. ‘왜 경로석에 50대가 앉아 있냐?’라는 것은 ‘젊은 게 감히 나이 든 사람을 위해 있는 자리에 앉다니’ 하는 겁니다. 할머니는 교통약자석을 경로석으로 인식하였고, 경로사상이 없는 요즘 사람들에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경로석과 교통약자석은 다릅니다. 경로석은 말 그대로 경로(敬老), 노인을 공경하는 자리입니다.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나이 드신 분이 타면 경로석이 아니더라도 얼른 자리를 내줘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됐습니다.
이렇게 당연하게 노인을 배려하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자리를 양보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에서 제도적으로 전체 자리 중에서 몇 개 정도는 노인분들 먼저 앉도록 지정했습니다. 젊은 친구들이 어른을 공경하지 않으니까 제도적으로 강제한 건데, 문제는 경로석을 만들어 놔도 잘 안 지키더라 이겁니다.
그뿐입니까? ‘경로석’이 아니라 ‘교통약자석’이라고 해서 노인뿐만 아니라 어린이, 임산부, 다리에 장애가 있는 사람 등을 위한 자리로 바꾸었습니다. 경로석이 교통약자석으로 바뀌게 된 과정을 가만히 보면 사회적으로 경로사상보다는 약자에 대한 배려가 더 중요하다는 인식의 변화가 담겨 있습니다. 어르신 입장에서는 원래 있는 자리를 뺏긴 듯한 기분이 들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다면 왜 경로사상이 우리나라에서 사라지다시피 했을까요? 제가 볼 때는 마을이 없어지고 이웃이 없어져서 그렇습니다. 마을이 없어지다 보니까 일상적으로 어른을 공경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속의 강제가 없어진 겁니다. 마을이 있을 때에는 매일 보는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을 속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아도 겉으로는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지하철에서 보는 노인은 남은 평생 동안 또 볼지 어떨지 알 수 없습니다. 보고 또 볼 확률이 거의 없으니까 굳이 그 노인에게 공경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마을이 없어져서 매일 부딪히는 어른이 없으니까 ‘생판 모르는 노인한테 굳이 자리를 양보할 필요가 있나?’ 하는 마음이 드는 겁니다. 마을을 조금 유식한 말로 하면 지역공동체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의 공동체를 마을이라고 해요. 마을이 없어졌다는 말은 지역공동체가 없어지고 개인만 남았다는 겁니다. 그전에는 대가족이라도 있었지만 요즘은 핵가족도 깨져서 혼자 사는 사람들이 서울시 가구의 3분의 1입니다. 지역공동체에서 개인 중심의 사회로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그 증거 중에 하나로 경로석이 교통약자석으로 바뀐 것을 들 수 있을 겁니다.
이 변화에서 경제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 즉 20대, 30대, 40대, 50대는 큰 문제가 없습니다. 지역공동체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가장 타격을 받는 사람은 노인이나 유아, 어린이들입니다. 예전에는 나이 드신 분들은 마을에서 알아서 어른 대접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에는 노인복지관으로 출근하거나 문화센터로 가야 합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한 분들은 심심하면 4박 5일 일본 여행 갔다 오고, 날이 추우면 태국 여행 갔다 오면 됩니다. 하지만 이도 저도 아닌 분들은 어떻게 합니까? 방콕 해야 합니다. 다리가 안 좋아서 돌아다니기 힘들고, 돈까지 없으니 TV를 친구삼아 하루 종일 집에만 있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이 우울해지고 스트레스 받고 힘들어집니다.
아이들은 또 어떻습니까? 옛날에는 큰 애가 작은 애 봐주고 주변에 있는 마을 사람들이 봐주고 그렇게 마을에서 아이들을 알아서 다 키웠는데 요즘에는 그렇게 안 합니다. 어린이집 보내고 유치원 보내고 학교에 들어가면 학원 보내고 방학 되면 무슨 캠프 무슨 캠프 다 보내야 합니다. 옛날에는 마을에서 애들끼리 놀면서 했던 것들을 요즘에는 다 돈 줘가면서 보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마을이 없어지니까 오롯하게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우니까 돈을 받고 전문적으로 서비스해 주는 곳에 보냅니다. 아이들을 키우자면 돈이 더 많이 들어가니 돈을 버느라 더더욱 아이들을 돌볼 시간이 없어집니다. 마을이 없어지면서 나이 드신 분들이나 아이들의 시간이 이렇게 변해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이런 상태를 방치하고 있어야 하느냐 아니면 노력을 해서 이런 상황을 타개해야 하느냐의 기로에 서있습니다. ‘마을이 없어졌으니까 마을을 만들면 되는 거 아니냐’ 하면서 시골마다 ‘행복 마을 만들기 캠페인’ 같은 걸 합니다. 여기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있었던 일인데, 관광지도 아니고 그냥 어쩌다 한 번 동네 사람이 지나다니는 논 옆에 작은 바람개비 같은 걸 1미터 간격으로 세워놓았습니다. 지자체에서 하는 ‘행복마을 가꾸기’라는 사업의 지원을 받은 것이라 합니다.
어느 날 신도가 찾아와서, “스님, 절에서도 뭘 하나 기획해서 돈 좀 타내세요.”라고 합니다. ‘행복 마을 가꾸기’라는 게 이웃들끼리 아이도 같이 키우면서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잘 포장을 해서 돈을 좀 타올까?’ 하는 것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이해관계가 서로 얽히고 얽혀서 시설 투자하는 것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얼마 전, 아이가 말을 안 듣는다며 아이 돌보미가 아이를 때리고, 또 아동학대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을 부모가 청와대 청원에 올려 10만 명의 사람들이 동의를 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역공동체가 사라져서 생긴 일입니다. 도시 같은 경우는 아파트밖에 없으니까 1층에다 공동생활을 할 수 있는 육아 마을, 독서실, 공부방 같은 것을 설치하면 어떨까요? 요즘 실제로 이렇게 하는 곳들이 있는데 사람들이 잘 안 간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이미 개인 중심으로 사는 데 적응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이웃사촌에 대해서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정책적으로 이웃이 함께 하는 공동체를 만들자 하면서 시설만 만들어 놓는다고 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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