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7월 4일 백중 초재 법회
의학적으로는 뇌사, 심폐사, 세포사 등 일정 부위를 기준으로 죽음을 판단한다. 반면 우리가 인식하는 죽음의 순간은 고인의 부재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구분짓는 것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영혼과 육신이 분리되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송장과 다를 것이 전혀 없는 이 몸뚱아리를 끌고다니는 것은 무엇인가?
의학적 죽음, 신체 기능의 죽음
의학적인 죽음은 유기체의 생물학적인 기능이 정지되는 것입니다. 뇌가 죽었다고 해서 죽었다고 볼 건지, 아니면 심장이 멈춘 것을 죽었다고 할 건지, 아니면 온몸의 세포가 다 완전히 죽은 것을 죽었다고 할 건지, 아니면 호흡을 하지 않는 그 시점부터 죽었다고 할 건지 말입니다. 의학적으로 따진다는 것은 법적인 죽음의 기준이 뭐냐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몇 월 며칠 몇 시 몇 분에 돌아가셨다는 사망신고를 해야 하니까 말입니다.
죽음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뇌가 완전히 기능을 정지하면 뇌사라고 합니다. 뇌에 호흡을 관장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에 뇌가 멈추면 호흡을 할 수 없습니다. 뇌는 죽었는데 인공호흡기를 달면 인공적으로 호흡이 되니까 죽었다고 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이런 게 뇌사상태입니다. 식물인간의 경우 뇌가 죽은 건 아니고 뇌의 기능이 대부분 정지했는데 호흡기능 등의 아주 일부가 남아 있는 겁니다. 이 사람은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실제로 식물인간으로 5년 동안 있다가 정신을 차렸다는 뉴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뇌사는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뇌가 완전히 죽은 겁니다.
그 다음 심장과 폐의 기능이 정지한 경우를 심폐사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심장이 멈추면 혈액 공급이 안 되고, 폐가 멈추면 호흡을 못합니다. 민법에서는 심폐사를 사망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의료현장에서는 대체적으로 여기에 더해서 뇌사까지 되었을 때 사망선고를 내린다고 합니다. 의사들은 환자의 뇌기능 정지 확인을 위해 눈꺼풀을 젖히고 전등을 비춰 동공반사 여부를 확인하고, 환자의 심장기능 정지 확인을 위해 경동맥을 짚어 맥박이 잡히는지 확인합니다. 그리고 환자의 폐기능 정지 확인을 위해 흉부에 청진기를 대고 숨을 쉬는지 확인합니다.
또 한 가지 세포사가 있습니다. 온 몸의 모든 세포가 다 기능을 멈추는 겁니다. 심장, 폐, 뇌는 기능이 정지했는데 다른 몸의 세포들은 아직 기능을 하고 있는 기간을 생사중간기라고 한답니다. 심장도 멈추고 뇌도 기능을 중지하고 폐도 기능을 멈췄는데 다른 세포들은 아직 자기 기능을 조금씩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폐사와 세포사 사이에 생사중간기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죽음의 순간을 칼로 두부 자르듯 나눌 수 없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숨이 멎는 때부터 죽은 것으로 간주합니다. 그 순간부터 가족들은 대성통곡을 하고 장례식 준비를 합니다. 사실은 아직 죽은 게 아닐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티벳의 경우에는 고승이 돌아가시고 나면 1년이고 2년이고 그대로 놔두기도 합니다. 그러면 분명히 돌아가셨는데 손발톱이나 머리카락이 자라나곤 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죽음은 일정한 시간을 다 포괄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면 사회적으로 일처리가 불편하니까 민법상으로는 심폐사를 죽음의 기준으로 두는 것입니다.
현실적 죽음, 죽음의 인식
반면 보통사람들이 생각하는 죽음의 순간은 분명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제가 가장 최근에 경험한 죽음은 제 은사 스님의 죽음입니다. 2019년 2월 18에 입적하신 후 염부터 다비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습니다. 염하는 걸 옆에서 보고 있어도 실감이 되지 않습니다. 머릿속으로는 같은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마음이 받아주지 않습니다. 다비를 마치고 나니 남는 것은 재뿐이었습니다. 그 재와 은사 스님은 전혀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분향소에 영정사진을 처음 걸 때야 비로소 ‘아, 은사 스님께서 돌아가셨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죽음을 실감했습니다. ‘아, 이제 은사스님은 더 이상 우리랑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지 않는구나. 영영 사라졌구나. 영영 없어졌구나’ 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영정사진은 살아 계실 때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염할 때 본 시신이나 다비할 때 본 재는 살아 계실 때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분향소에서 영정사진을 보고서야 현실적으로 죽음을 느낀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죽음은 육신이 어떻게 변하느냐 하는 게 아닙니다. 고인이 영영 우리 곁에서 없어졌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순간이 바로 그 사람이 죽은 순간입니다.
삶과 죽음의 차이는?
우리는 살아 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을 별개로 생각 하는데, 예를 들면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봅시다. 달리는 자전거는 살아 있는 자전거, 멈춰 있는 자전거는 죽은 자전거라고 합니까? 자전거가 달리면 살아 있고 멈춰 있으면 죽었다고 말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달리거나 멈추거나 다 같은 자전거입니다. 차도 마찬가지입니다. 차가 가만히 있다고 해서 자동차 시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에 대해서는 살아서 움직이면 그냥 사람이라 하고, 죽어서 유기체의 활동을 안 하고 가만히 있으면 시체라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이것이 첫 번째 의문입니다.
두 번째, 생명이라는 것이 사람의 육신에 들어와서 결합돼 있으면 이 사람은 살아 있는 거고 생명이 사람의 육신하고 분리가 돼서 빠져 나가면 이 사람은 죽은 거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과연 이 생각이 맞는 생각일까요?
흔히 혼(魂)이라고 합니다. 혼이 들어오고 나가고, 혼이 자기 몸을 못 찾아서 구천을 떠돌고, 혼이 원한을 가지면 원귀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자전거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전거가 달리고 있을 때는 그 자전거와 자전거의 생명이 결합되어 있고 자전거가 멈춰 있으면 그 자전거에서 생명이 빠져나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게 제가 여러분들에게 던지고 싶은 두 번째 의문입니다.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바로 답을 하라는 게 아니고 한 번 생각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절 집에 이런 화두가 있습니다.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은 무엇인가? 역으로 말하면 우리는 다 송장이라는 겁니다. 송장은 송장인데 어떤 송장이냐? 말도 하고, 웃고, 울고, 잠도 자고, 밥도 먹고, 성질도 내고 그렇게 하는 송장입니다. 가만히 있는 송장도 있고, 돌아다니는 송장이 있는 겁니다.
이 송장을 끌고 다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이 질문을 여러분들 스스로에게 해보십시오. 이 화두를 마음속에 꼭 넣고, 오늘 주무실 때까지 품고 계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