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7.05 초사흘법회
“행위만 있고 그 행위를 하는 주체는 없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불교의 가장 핵심인 무아(無我)사상입니다.
다시 한번 용수 보살의 비유를 들겠습니다. 여기에 초가 있다고 합시다. ‘A라는 초’가 탄다고 할 때 허공에 바로 불이 짠 나타나서 A 초 심지에 붙고, B, C 초로 옮겨가고, 심지가 다 탈 때쯤 되면 불이 다시 저 허공으로 사라지는 겁니까? 초가 없이 촛불이 탈 수 있습니까? ‘불’ 그 자체로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이 옮겨 붙었다’고 말입니다.
누가? 불이. 어떻게? 이 초에서 저 초로 옮겨갔다. ‘불이 옮겨 붙었다’는 말 속에는 마치 ‘불’이라는 독립적인 존재가 있어서 이것이 A라는 초, B라는 초, C라는 초로 옮겨간다는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A라는 초에서 촛불이 타올랐다가 꺼집니다. 그리고 B라는 초에 촛불이 타올랐다가 꺼집니다. A라는 초에 불이 커져서, 아니면 바람이 휙 불어서 그 옆에 있던 B라는 초의 심지가 타오르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조건을 불교적으로 말하면 ‘인연이 생겨서 그렇다’고 합니다.
불이라는 어떤 존재가 있어서 그것이 자기 발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불이 타오르고 각각의 불이 서로 어떤 인연에 따라 다른 초의 심지가 타는 원인을 제공한 것입니다. 윤회도 이런 식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 용수 보살님의 이야기입니다.
윤회는 시작도 끝도 없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각각 타오르는 불꽃이 어떤 인연에 따라서 옮겨가는 것이라면, 윤회는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나는가?’ 상식적으로 생각하기에 모든 일은 시작이 있고 끝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부처님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라 했습니다.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고 말입니다.
윤회를 놓고 보면 ‘어떤 무언가가 윤회를 한다’고 가정했을 때는 우선 그 뭔가가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뭔가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전지전능한 절대적인 존재가 있어서 그것이 무언가를 만들었고 ‘그것이 윤회를 한다’고 칩시다. 그런 식으로 계속 따져가다 보면 모든 것을 만들어 낸 신은 누가 만들었느냐는 질문에 도달합니다. 서양 철학에서 근본적으로 탐구하는 문제가 이것입니다. 신은 누가 창조했는가? 그것이 존재론이고 인식론입니다. 고민 끝에 대답한 것은 ‘신은 스스로가 스스로를 창조했다’는 것입니다. 서양 철학의 형이상학에서 제1원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이 어떤 시점에서 자기 스스로를 창조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창조하는 시점에서 신은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만약에 신이 이미, 하여튼, 그냥 존재하는 상태에서 신을 창조했다고 한다면,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부처님이 말하는 무시무종과 같은 말입니다. 신은 스스로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아득한 옛날부터 존재해야 합니다. 반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시점에서 신이 창조자였다고 하면 기본 전제가 부정됩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상태라면 신도 역시 존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無)에서는 유(有)가 나올 수 없습니다. 무에서 유가 나오면 창조라는 말 자체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신은 스스로를 창조할 수 없고, 다시 말하면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한번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이 세상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실제 이 세상은 어떻습니까? 지구가 45억 년 전에 탄생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계는 150억 년 전에 탄생했고,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200억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학이 더 발달한 현재에는 이 우주 말고 또 다른 우주가 있고, 그런 우주가 무수히 많다고 합니다. 그것들이 언제 생겼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우리의 과학으로는 시작과 끝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현재까지는 부처님이 이야기하신 무시무종이 진리입니다.
아무리 현대 과학이 발달해도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시작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무아(無我)를 이야기했습니다. 부처님은 ‘여기에 뭔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무엇이든 관계 속에서 서로 엮여 있으므로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대상이 언제부터 있게 됐는지를 아무리 고민해 봐야 소용없습니다.
윤회가 언제 끝나느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수행자가 열심히 수행하여 무아의 진리를 깨쳤다고 할 때는 ‘내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커다란 착각이었구나. 원래부터 나는 없었구나’라는 걸 깨친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치는 순간 윤회가 끝나는 것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깨치기 전에는 계속 윤회를 하는데 깨치면 이미 내가 윤회를 했던 그 모든 사실이 착각이었다고 깨치는 것입니다. 이말은 곧 깨쳤다고 해서 이 세상에 있다가 다른 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똑같은 세상인데 단지 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것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윤회가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디냐?’ 이런 질문은 그 자체가 잘못된 질문이라는 겁니다.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
다섯 살 정도 된 아이가 부모에게 “동생은 어디서 왔어?”라고 물을 때 우리는 뭐라고 합니까? “남자의 정자가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가서 자궁 속에 있는 난자와 결합하여 세포분열을 거쳐 증식을 한 후에 여자의 몸 밖으로 나오면 그게 바로 네 동생이야” 이렇게 말하면 아이가 알아듣습니까? 이게 사실이지만 못 알아들으니까, “삼신할머니가 데리고 오는 거야”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이는 삼신할머니에게 새 동생을 만들어달라고 기도를 하겠지요.
부처님도 중생들이 심오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면 알아듣지 못하니까 쉽게 이야기한 것입니다. “공덕을 쌓으면 복으로 돌아온다”라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사실 업보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보시한다는 마음을 버리고 무주상보시를 해라” 이런 말은 사실은 아까 말한 업보는 있으나 작자는 없다는 것을 중생들의 근기에 맞게 이야기 한 것 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 내가 기도를 열심히 하면 부처님이 들어주는구나!’ 라고 생각합니다. 마치 아이가 삼신할머니에게 동생 하나 달라고 조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윤회에 대해서 올바로 알고 믿음이 맹신으로 발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