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백전 저녁 예불
‘이렇게 살다가 언젠가는 죽겠지?’ 새벽 예불을 하며 절을 하다가 문득 든 생각입니다. 이마가 좌복에 닿는 잠깐동안 불쑥 찾아온 생각은 그 후로도 쉬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중에서 가장 확실한 사실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뿐입니다. 오직 이것만은 100% 확실합니다. 게다가 내게 허락된 날들이 살아온 날들 보다 적을 듯합니다. 무언가를 이룬다는 건 부질없는 일입니다. 죽어서 가져갈 것도
힘드세요?!오백나한과 인연 맺고 기도해 보세요 희유한 일이었다. 시름시름 앓는 김방의 병은 원인을 알수 없었다. 그러니 백방이 무효였다. 하루는 멀리서 의원이 찾아와 김방의 병세를 살피고 닭똥집이 특효라는 처방을 내렸다. 부처님 도량에 오백전 불사를 발원한 시주자에게 육식이라니… 김방의 병세가 깊어지면서 고민도 깊어만 갔다. 마침내 병석에서 일어나기를 권하는 대중들의 뜻에 따라 닭똥집을 약으로 삼았다. 그렇게 병을 떨친 김방은
오백나한과 인연 맺으려면 배고픈 다리를 건너야한다 지난달, 증심사 오백대재가 열렸다. 오백대재는 일 년에 한 번씩 오백전에 모셔진 오백나한과 인연을 맺는 날이다. 흔히 광주의 얼굴이 증심사이고, 증심사의 상징은 오백전이라 한다. 오랜 세월 광주 사람들은 증심사 오백전을 찾아 오백나한에게 기원하고 그 뜻을 성취해 왔다. 그렇게 귀한 오백전 나한과 인연을 맺기 위해서는 꼭 건너야 하는 다리가 있다. 바로
세종대왕 재위 시절(1443년), 광주의 생명젖줄인 경양방죽을 축조한 광주목사 김방은 관세음보살 현몽을 좇아 오백전을 불사했다. 6.25전쟁 당시 다른 전각은 불에 탔으나 증심사 오백전만은 불에 타지 않았던 영험한 곳이다. 증심사 오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좁은 공간에 500명의 나한을 모시다 보니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불단을 ‘ㄷ자’ 형으로 배치했다. 대웅전 같은 화려한 닫집도 없다. 그저 비어 있는
“광주의 진산 무등산에서도 으뜸 기도처는 증심사 오백전입니다. 오백전에서 기도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은 복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백전 기도를 주관하고 있는 종문스님은 “전생에 지은 복이 있어 오백전에서 기도하는 인연을 얻게 되었다”며 미소 짓는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종문스님의 초발심은 기도보다 선(禪)수행이 먼저였다. 90년대, 종문스님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엔 사회적으로 단(丹) 수행, 국선도 등 수행 열풍이 불었다. 평소